집안 재산 몽땅 털어먹는 파락호 좋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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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락호(부수는 파, 떨어지는 낙, 집안의 호)”는 재산이나 세력이 있는 집안의 자손으로서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 버리는 도락실(주색과 잡어 등 허황된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말이지만, 어려운 일제 강점기 속에서, 닛케이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파락호의 체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쿠 본 김성일의 13대 종손인 김용환(돈 룡환, 1887~1946년)선생이 바로 그런 분이다.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선생은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일본 경찰에 의해 종갓집 마당에 꿇어 엎드려 죽는 수모를 당한 것을 계기로 일제의 만행에 분노하여 독립운동을 하였고 이로 인해 투옥되었다. 갖은 고초를 겪고 풀려난 그는 그 뒤 어떤 이유에서 노름판을 돌아다니며 집의 가산을 탕진하면서 현재 시세로 200억원 상당의 재산과 논밭을 도박으로 날렸다. 심지어 외동딸이 시집갈 때 시댁에서 장롱을 준비하라고 준 돈까지 도박으로 탕진했다가 딸이 헌 장롱을 들고 울면서 시집갔다는 일화도 있다. 주위에서는 도박으로 전 재산을 탕진한 그를 보며 “파라크호”라고 손가락질했지만 사실 그의 행동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었다. 도박꾼으로 전락해 일제의 혐의를 피함과 동시에 자신의 전 재산을 비밀리에 독립자금으로 만주에게 송금한 것이다. 자신의 가족은 물론 외동딸까지 속여 독립운동에 전 재산을 바친 김용환. 용환 선생은 해방 후 친구로부터 (전재산을 독립자금으로 보낸 것) 이제는 말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는 말을 들었을 때 학자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며 숨을 거둘 때까지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1995년의 김용환 선생에게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자 하나뿐인 외동딸 킴후옹 부인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고 한다.”그냥 나이도 많고 열여섯에 청송마평 서씨의 문옆에 혼인은 했지만, 혼행일 받아도 못가는 딱한 사연.신행 때 농부집에 맡긴 돈, 그 돈까지 가져가서 어디에 썼는가?”아빠를 기다리며 신행을 늦췄다가 큰 물건을 팔던 헌농신행을 발에 올려놓자 주위가 흐물흐물.그에게서 시집온 생활이 주눅들어서 안절부절못한다고 강변 모래밭에 꺼내 부수고 태우니 오동나무 삼중장이 불꽃은 왜 그리 높을까, 신부 오만 사제 간장, 그 광경 어떨까.”모두, 우리 엄마를 원망하고, 이상한 시집을 사기 위해 오만사제 간장을 녹였는데, 오늘에서야 정신을 차리면, 이 모든 것들,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을 내놓으려고, 그 많은 천석재산을 다 바쳐도 모자라 하나뿐인 외동딸, 시댁에서 보낸 농비, 그마저도 다 바쳤다 그럼 그렇지, 우리 아귀, 참봉은 나을 것이다.내 생각대로 절대 사람이 말하는 파락호가 아니래.우리 참봉 나리….”

많은 의리의 행동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어떠한 행위도 혈연 앞에서는 주저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지도층의 많은 잘못(위선)이 파헤쳐지는 청문회에서, 가족의 문제도 저의 불찰입니다. “나의 가족은 그만해줘, 나를 혼내주세요라는 것도, 자신이 당하는 모욕과 모욕은 참을 수 있어도, 혈육에 영향을 미치는 것에 대해서만은 막고싶다는 심리이다. 그러므로 외아들 농비까지 떼어내 독립자금으로 보낸 선생님의 행동은 숭고함을 넘어 서릿발 같은 차가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선생님이 말한 “선비”에 주목한다. 맹자는 물질적 토대인 항산이 없어도 도덕적 항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선비라고 불렀다. 항심의 개념과 선비정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논할 역량이 없다. 다만 선인들은 항심, 즉 변하지 않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선비의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고 그 변함없는 마음, 즉 뜻을 바로 세우는 것을 중시했다. 자신의 중심이 확고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뜻이 있었기에 “파라크호”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흔들림 없이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고, 하나뿐인 혈육도 큰 뜻 아래 둘 수 있었다. 옛 선조들이 뜻을 먼저 세우라고 했던 말씀을 다시 한 번 돌아본다.